구약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어 심판하신 사건들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 때에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일을 알고 있으며 롯의 시절에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신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또 아담시절에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신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화를 내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피조물인 인간을 통해 영광을 받기 위해 창조하셨음에도 인간들은 창조의 목적에 어긋나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화를 내게 만드는 존재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떤 것들이 하나님을 화나게 해드리는 일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자리에서 변화되어 창조의 질서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깨닫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경건치 않음과 불의(18) [2]하나님을 불신한 것을 핑계치 못함(19-20) [3]하나님의 영광을 우상 숭배로 바꾼 죄(21-23)입니다.
[1]맨 먼저 18절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8절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인간들의 죄악들을 3장 18절까지 계속 지적하고 있는데 지적되는 모든 죄악들을 통 털어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로 하여금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하셨는데 이를 믿지 않고 거절한 죄가 진리를 막는 죄요, 경건치 않음과 불의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이 불의하지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함으로 불의한 자였던 자가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의롭게 되는 길을 받아드리지 않고 불의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모든 인생을 진리를 막는 자요, 경건치 않고 불의한 자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란 착한 일을 많이 한 자와 나쁜 일을 한 자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얼마나 선행을 했던지 악한 짓을 얼마나 했는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지금 나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구세주로 믿는 자는 의로운 자요 이를 믿지 않는 자는 불의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들이 불의 한 자가 되는 것은 요한 복음 3장 16절과 같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시고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셨으나 하나님의 이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거절한 까닭입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진리를 거절하고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길을 거절한 모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내린다고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19절부터 20절까지의 하나님을 불신한 것을 핑계치 못함(19-20)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전도를 받고도 믿지 않았거나 전연 하나님에 대해 전도를 받지 못하여 믿지 않았거나 믿지 않은 자는 핑계할 수 없다고 본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19절에서 밝히고 있는 핑계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고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고 했는데 이런 창조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을 찾고 알만한 양심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신문 방송을 통해 고아로 입양된 자들이 자기를 낳아 주신 생부모를 찾게 되는 것을 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부모를 찾는 마음을 주신 모양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모든 인간에게 영적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찾고자하고 알고자 하는 선한 양심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에 위험을 당했을 때에 믿는 자이건 불신자이건 하나님 살려주세요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양심에는 하나님께서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 주어졌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사람의 양심에는 하나님을 찾고 알게 하는 양심을 주셨으나 이를 거절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믿지 않았으니 전도를 받았던 받지 않았던 믿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0절에서 또 핑계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만물 안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들어 있음에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나 동식물이나 해와 달과 별들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한 것이 틀림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우주 만물 안에 하나님의 솜씨임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은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같은 땅속에서 갖가지 색과 갖가지 모양의 꽃과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거나 수많은 모양의 동물들을 보면서 정말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데 그 둥근 지구 사방에서 다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나 그 둥근 지구가 받침대가 없이 공중에 떠서 돌고 있다니 그 누가 이런 묘기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지구 곳곳에는 사고가 연발하는데 지구나 천체에는 큰 사고가 없이 질서 있게 천체가 운행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운전대를 쥐고 계심이 틀림없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만든 차는 매 3천 마일마다 오일 체인지를 해주어야 하는데 사람의 몸은 평생 오일 체인지를 해주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요사이 컴퓨터는 많은 것을 자동으로 돌아가게 하고 있는데 그런 컴퓨터가 나오기 전에 만들어진 우리들의 몸은 완전히 자동으로 눈물이 나와 눈이 마르지 않게 하고 피부에도 자동으로 무료 로숀이 나와 피부가 마르지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하나님이 주신 눈과 양심으로 바라본다면 이 우주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은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21절부터 23절까지의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 숭배로 바꾼 죄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는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부모에게 효성을 지극히 하는 자녀들도 있고 부모에게 효성을 하기는커녕 부모를 괴롭히는 불효한 자녀들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21절부터 23절까지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자녀들 중 하나님께 불효한 자녀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1절과 22절에서는 창조자 하나님께 마땅한 대우를 해드리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은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질서를 따라 창조자를 창조자로 대우를 해 드려야 하며 피조물은 피조물로서 조물주에게 감사하야 함에도 그렇지 못함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사도 바울은 생각이 허망해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진 자라 했습니다. 또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미련한 자라 했습니다. 아무리 철학을 알고 천문학을 아는 박사라 할지라도 자기를 낳아 주신 영적인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그분들께 해드려야 할 마땅한 대우를 해드리지 못한다면 미련한 자요, 생각이 어두운 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지혜와 지식이 있는 자로 인정을 받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미련한자라 할 수 있는 것은 영광을 받으실 창조자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만든 우상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세상 만물을 보면서 그 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 볼 수 있듯이 세상 철학이나 과학 또는 세상 학문을 깊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깊어지는 연구를 통해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만나 뵐 수 있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적은 지혜나 지식이 들어가면 교만해져서 그 적은 것 가지고 하나님을 부인하며 하나님 대신 자기가 만든 여러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 그 우상을 위해 인생을 바치니 바로 이런 자들은 우둔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생을 버리고 불신을 통해 썩어질 임시의 삶을 택한 자들임으로 그들은 심히 어리석은 자들이요, 창조주가 받으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가 만든 우상에게 영광을 돌리니 심히 미련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미련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좇아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이 주는 교훈은 하나님이 받으실 마땅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세상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보고 참 아름답다는 말을 하는데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 생각되십니까? 아름답다는 판단을 주게 되는 것은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물건이 있어야 할 곳에 그 물건이 위치에 있을 때에 아름답다는 생각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을 앉혀드리고 세상의 것은 세상 것이 놓일 자리에 세상 것을 놓아두는 질서를 지켜 아름다움을 유지하라는 교훈입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받으실 마땅한 대우를 해드리고 피조물이 받을 대우를 그에 맞게 해주는 질서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받으실 마땅한 대우란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창조자이시며 영원하시며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인류를 사랑하신 분이 받으셔야할 마땅한 대우를 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그것이 높은 자리이건 그것이 많은 재물이건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므로 행여나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의 자리에 올려놓고 그것을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자로 믿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핑계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어야 하며, 그 창조자가 인류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며 할 수 있는 모든 영광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세상의 어떤 것보다 낮은 자리에 낮춘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내린다는 엄한 경고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대우를 받고 계시는지 아니면 세상 것보다 푸대접해드리고 있는지 반성해보고 대우를 높여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과 세상일을 놓고 항상 하나님을 우선 순위에 두는 일을 절대적으로 지켜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하나님을 대우하는 일에 보다 더 열성을 더하므로 영광을 높여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더 높여드리고 더 대우해드릴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실 영광을 높여 해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