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니온에서의 성공적인 전도 – 사도행전 14:1-7

지난 주에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성공적 전도를 통해 교훈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첫 설교를 했는데 반응이 좋아 둘째 주에는 온 성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자 다 몰려와서 말씀 듣고 믿는 자가 많이 나왔고, 말씀에 감사하여 말씀을 찬양했고,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았고, 반면에 이 온 성이 뒤집힌 성공적 전도에 시기가 난 유대인들이 성의 유력한 귀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추방시켜버리므로 두 사도는 발의 먼지를 털어버려 그 성에서 유대인들이 복음에 반대했던 증거를 남겼으며, 유대인들에게 우선적으로 말씀이 전달되어야 하나 그들이 반대하므로 그 축복이 이방인에게로 돌아가고, 바울 자신은 이방인들을 위해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선포했고, 두 무리를 구분하기를 믿음을 받아드린 무리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로 표현했으며, 반대자들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자로 ‘스스로 포기하는 자들’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추방을 당해 이고니온으로 떠나왔는데, 오늘은 이고니온에서의 성공적 전도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여기서 얻은 교훈을 통해 감격과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는 귀한 말씀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1]성공적 전도 [2]핍박 [3]새 전도지역으로의 이동입니다.본문 강해에 들어가기 전에 성공적으로 전도를 했던 이 도시 이고니온에 대해 잠깐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은 터키에 있고, 그 당시는 갈라디아 지바에 위치한, 로마가 통치했던 도시로 지금도 그때도 소아시아 지역에서 제일 큰 도시라고 합니다. 현재의 이름은 코니에인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약 90마일 떨어진 소아시아 중앙평야의 끝에 위치한 아주 땅이 비옥하며, 교통의 중심지며 회당이 많아 복음 전하기 좋은 도시로 에베소와 비시디아 안디옥 사이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여행 때 전도에 의해 큰 교회가 세워졌고, 여행에서 돌아올 때 재방문 했으며, 2차 전도여행 때에 또 방문했고, 3차 전도여행 때도 또 방문했습니다.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교회들 중 하나입니다.

본문 강해에 들어가서

 

[1] 성공적 전도(1,3)

1절에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비록 한 절밖에 안되는 짧은 구절이지만 성공적 전도를 한 많은 요소들이 이 한 절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두 사도가 함께”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두 사도가 함께라는 말은 같은 복음 사역을 위해 불리움을 받은 두 사람이 맡겨진 사명을 위해 같은 봉사를 하고 있다는 뜻으로 정신이 같은 사람이란 소개입니다. “함께”라는 뜻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격려, 서로 협력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완수하려는 사랑, 일치, 연합의 표현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다”는 표현입니다. 회당이 어떤 곳입니까? 사람이 많이 모인 곳, 효과적 전도 위해 사람이 모인 곳에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전j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회당에, 또 길가에, 또 남의 집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은 “말했다”는 것입니다. 가서 무엇을 했다고요? 말을 했다. 복음을 전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다. 그를 통해 죄사함 얻는 구원을 선포했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생각해야 할 것은 주 사람이 함께 가서 말을 했는데, 그들은 같은 말을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두 사도가 교리관이 다르면 각기 딴 소리를 하게되어 오히려 듣는 자들이 혼돈을 갖게 되었을텐데, 성경을 보는 눈이, 성경이해가, 말씀실천이 같았기 때문에 같은 말을 했음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전도의 효과 위해 말씀이해, 말씀지식이 우리 모두 같아야 합니다. 한인교회 몇 사람이 안되는데 구원관이 다르고, 조직관이 달라서 세례 받지 않아도 된다든지, 약식세례 받아도 된다든지, 악기를 사용해도 된다든지, 매주 만찬 행하지 않아도 된다든지, 전도자를 목사로 불러도 된다든지, 여자집사 있어도 된다든지 하는 여러 의견 있다면 성공적 전도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유대와 헬라란 표현입니다. 유대는 유대인, 헬라는 이방인입니다. 전도 대상을 제한치 아니하고, 아니 차별치 아니하고, 부자든 가난한 자이든, 학식이 많던 없던 평등하게 기회되는 대로 전했다는 뜻입니다. 복음 듣고자 하는 자에게 다 전한다는 뜻입니다.

허다한 무리가 믿었다고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므로 차별치 아니하고 복음을 뿌린 열매가 맺혔는데 허다한 무리가 믿었다는 풍성한 전도의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에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앞에 2절에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시기심으로 또 핍박이 시작된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핍박이 시작되었지만, 두 사도가 복음 전도를 포기치 아니하고 오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 기간이 되었는지 기록이 없지만 겁내지 아니하고 지속적으로 핍박을 견디며 전도한 모습입니다.

그 다음은 “주를 힘입어”입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자기 힘으로, 자기 지식으로, 자기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주를 힘입어 주님께 의지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주를 힘입었기 때문에 승리의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담대히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겁낼 것 없습니다. 위축당하지 아니했습니다. 말씀을 현실과 타협하지 아니했습니다. 반대파 즐겁게 하려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히 전하니 그들의 손을 통해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주님의 능력이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기 원하는 종들에게 주님의 나팔이 되기 원하는 종들의 손을 통해 크고 작은 능력들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어 복음증거가 보다 효과적으로 되도록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2] 핍박입니다.

2절에 보니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불신자 유대인들이 선동하여 복음전도를 방해하기 위해 이방인들에게 악평을 했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이렇게 선동하는 유대인들을 따르는 자들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고 했으며, 5절에 보니 “이방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란 기록이 있는데, 반대파들이 공공연한 모욕을 주거나 신체에 여러 모양으로 위험을 당하게 하고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 핍박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돌로 치려는 것은 사형이나 다름없는데 사형이란 관의 승인 없이는 되지 않는 것으로 내적으로 관의 승인을 얻어 행한 핍박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회당의 영적 승리는 유대인들의 반발을 사게 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진리와 비진리로 나뉘어질 수밖에 없으며, 마귀는 안간힘을 다해 진리를 대적하지만 사단의 방해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도 강하게 나타나서 승리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전도자들이 모든 사람에게 다 환영받는 것이 아니고, 환영도 받고 또 핍박 즉 반대도 받는 것은 요 15:20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터이라”하고 하신 말씀대로 인 것입니다.

 

[3] 새 전도지역을 찾아감

6절에 보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란 기록이 있습니다. 살기가 등등하므로 오히려 돌로 쳐죽이려는 음모를 빨리 알아차릴 수 있어서, 그곳을 피하여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대로 순교당하면 전도의 기회 잃게되므로 더 효과적 전도를 위해 그 지역을 떠나서 새 일터를 찾은 것입니다. 도망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고니온에서 40마일 떨어진 루스드라와 다른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전도 효과 위해 이곳이냐, 저곳이냐 저울질하는 것 전도자에게 중요한 일 같습니다. 순교가 만능은 아닙니다. 고집이 전부는 아닙니다. 마 10:23에서 주님께서 “이 동네에서 저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지나치지 못해서 인자가 오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이 주는 교훈은 전도를 위한 모범이요, 바울과 바나바가 경험한 것이며, 전도자들이나 우리 모두가 걸어야할 길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범적 전도방법입니다. 우리가 이 전도 방법을 몸에 익혀 주님 오시기 전에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께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공적 전도방법을 택하고 핍박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핍박이 심하면 전도지역을 이동하는 것입니다. 성공적 전도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함께 가서 만나는 사람에게 담대히 말하는 것입니다. “함께”는 같은 사명감 갖고 협동하는 것이지요. “가서”는 전도 대상자를 찾아다니란 것이고, “만나는 사람이란” 전도대상에 차별 없이 복음 듣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균등히 전한다는 뜻이며, “담대히”란 자기 힘 의지하지 않고 늘 주님의 능력 의지하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어 꼭 승리케하리란 확신 갖고 자신있게 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손에 의해 전도의 효과 위해 필요한 모든 여건, 기사와 이적 같은 사건이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한다”는 뜻은 잡담이 아니라, 잘못된 교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부탁하신 그 말씀, 일치된 말씀, 진리를 모두가 똑같은 말로 전해서 어두운데 빠져있는 자를 밝은 데로 인도하고 죽을 곳에 있는 자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며, 절망의 자리에 있는 자를 소망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전하다 보면 환영객도 있고 심히 모욕을 주는 핍박자도 있겠으나, 핍박은 주님께서 당하셨던 당연한 것으로 알고 그것 때문에 조금도 위축될 것 없고, 핍박이 지나치면 더 효과적으로 전도하기 위해 새로운 전도지역 선정하여 새 지역에 가서 또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 몇 번 반복하고 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상 주시려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감당하시러 주님 다시 오실 때 다 상을 받는 우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