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행 – 사도행전 21:1-16

지난 주 20장 마지막 장면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앞으로 다시는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말을 인하여 장로들이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크게 울었으며,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의 송별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1-16절까지에서 바울이 그의 3차 전도여행을 끝맺는 마지막 부분인 밀레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에 일어났던 일들을 살펴보면서, 여기에서 주는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고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여행하면서 일어난 일들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 같은 마음 자세를 가지므로, 오늘 본문에서 주는 교훈이 더욱 우리에게 생동력이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2부분으로 나누어

[1] 두로까지의 여행(1-6)

[2] 예루살렘까지의 여행(7-16)

 

[1] 두로까지의 여행(1-6)

바울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해야겠다는 계획에 따라 지금의 여행은 전도를 위해 가는 여행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길에 있었던 것입니다. 되도록 어느 곳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속히 가고자하지만 배를 전세낸 것이 아니고 일반 화물 여객선을 타고 밀레도에서 고스에 가서 하루를 지나고, 그 이틀 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 바다라로 가고 거기서 직행으로 갈아타고 640kn 거리인 두로에 상륙했으며, 배는 그곳에서 짐을 풀게되어 그곳에서 7일을 머물게 된 것입니다.

이 두로는 마 11:21에 “화가 있을찌어다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다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라고 했던 그 두로입니다. 윤전도자님이 요한복음을 강해하면서 반복해서 지적하셨지만 이적 기사를 많이 행했던 벳세다와 고라신은 회개치 아니하고 믿지 아니했다는 것이고, 그런 능력이 행해지지 아니한 두로 사람은 주님을 믿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하나님 나에게 무엇을 보여 주시면 믿겠나이다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바울 일행은 두로에서 제자들을 찾아다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의 감동이 있어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게될 것을 알게되어 개인적인 의견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을 만류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통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전하라는 것은 아니었겠지요. 왜냐하면 바울에게도 성령의 감동이 있어 성령의 뜻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함을 받았지만, 동정과 사랑은 고맙지만 바울에게는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그들을 떠나게 됩니다. 두로에 있는 제자들 모두가 그 처자와 함께 성문밖까지 전송하여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는 장면을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누가가 여기에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여기에서도 성도들의 진한 눈물이 있었을 것입니다.

 

[2] 예루살렘까지의 여행(7-16)

두로에서 배로 돌레마이에 이르러 하루를 지내면서 형제들의 안부 묻고 권면했으며, 그 다음 가이사랴에 가서 여러 날을 묵은 후 그곳에서 104km 되는 예루살렘까지 들어가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돌레마이에서는 하루를 묵고 형제들의 안부를 묻고 가이사랴로 떠닜다는 간단한 기록뿐이나, 가이사랴에서의 일은 좀더 자세히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이곳 가이사랴는 고넬료의 마을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7일군 중 빌립의 집이 이곳 가이사랴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전도자의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약 20년전 스데반이 순교 당할 때 빌립은 스데반의 친구요,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게한데 앞장 섰던 원수였으나 이젠 동역자로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놀랍지요?

바울이 가이사랴에 머무는 동안 빌립의 집에 머울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 빌립에게는 딸이 넷이 있는데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되는데, 하나는 여자가 예언을 했는데 왜 여자 직분이 안되는냐는 것이고, 또 예언이 지금도 가능하다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답은 예언이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인데, 지금은 성경이 완성되어 있으므로 다른 예언 계시가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그 당시는 하나님께서 남녀 종들로 예언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었던 것이지요. 또 교회 내의 여자의 직분과 일에 대해 성경에서 분명히 언급되어 있으므로, 이 처녀 예언자는 특수한 시기에 특수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였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줄 압니다. 여자 집사를 주장하는 자들은 늘 이야기하지만 한 아내의 남편, 또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했다는 분명한 기록을 버리고, 일자 일군 뵈뵈라든지, 처녀 에언자만 눈에 들어오게 되는 고집스런 눈을 갖게 됩니다.빌립의 4딸이 예언하는 자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그 딸들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환난을 당할 것을 예언했으리라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가 딸들이 예언자라고 기록했을 겁니다.

10절부터 14절까지 보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는 사람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였던 것입니다. 이 아가보란 선지자는 행 11:2에서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하여 바울과 바나바의 손으로 예루살렘에 부조를 보낸바 있었으므로 아가보와 바울은 15년전 쭘 한번 대면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 가이사랴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니, 권해도 듣지 않으므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권하는 것을 그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사람들의 바울을 아끼는 대접이 나타나 있습니다.

15,16절을 보니 여러 날 후 행장을 준비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오래된 제자 구부르 사람 나손을 데리고 함께 갔는데, 나손의 집이 예루살렘에도 있어 그 집에 머물려고 함께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손은 70인 제자 중 하나였다고 봅니다. 예수 믿은지 오래되었다는 의미로 오랜 제자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을 통해서 얻은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은 다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셔야 한다고 할 때, 그래서는 안된다고 강력히 만류하였고, 주님은 사랑을 표현한 그 제자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신 것을 기억나게 합니다.

두로에 있는 형제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곧 일어날 환난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가지 말도록 권했으나, 바울은 그것을 사람의 일로 받아들였으며, 하나님의 일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었으며, 가이사랴에서 아가보의 실감있는 예언을 듣고 형제들이 간곡하게 바울을 만류하려 했으나, 바울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듯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그들의 권면을 강력히 물리쳤습니다.

만일 그들의 동정과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베드로의 권면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사람의 일이었음이 사실입니다. 바울은 성령에 이끌리어 살았으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그의 길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인간이기에 잔을 내게서 물러가게 해달라는 주님의 기도와 같이 바울의 심정도 많이 약해져 있는데 울면서 간곡히 만류하니 마음이 더 약하게 되었겠으나 강력히 물리쳤던 것입니다.

작은 내 이익 때문에, 사소한 일 때문에 주님 섬기는 일을 일시로 중지하는 우리 믿음에 경종을 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주님의 뜻이며, 무엇이 사람의 생각인지를 늘 판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별이 되면 내게 무슨 손해가 나더라도, 내게 어떤 고통과 환난이 따르더라도 그 길 따르고, 일시적인 현재의 삶보다는 영원한 천국생활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면 천국이요, 동정과 사랑이 사람의 뜻이니 그것을 받아드릴 때의 결과는 지옥입니다.

바울이 만류해도 고집을 부렸는데, 이것은 고집 센 인간의 고집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섬기는데 방해 놓는 것이, 그것이 학교라면 학교를 포기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사업이면 사업을 포기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친구나 형제나 부모나 친척이라면 그것 포기하고, 직장이라면 직장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생각인 줄 알면서 그대로 진행하다 주님 오시면 아무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 생활 가운데 늘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생각을 이기고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