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립바 왕 앞에서 행한 바울의 증언(1) – 사도행전 26:1-18

지난 주에는 바울의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언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교훈을 받았습니다. 즉 아그립바 왕이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을 축하하기 위해서 자기 아내 버니게와 함께 베스도를 찾아온 사실과 바울이 가이사 황제에게 호소하므로 총독 베스도는 바울을 가이사 황제에게 보내야하므로 죄목을 기록하여 보내야 하는데, 무죄임이 사실인줄 아는 베스도로서는 범죄 사실을 기록할 아이디어가 없어서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에 대한 상담을 하므로 아그립바 왕이 바울을 만나보고 싶다고 하여, 총독 베스도는 그 다음날 죄수 바울의 증언을 듣되 유대지역의 높은 사람들을 다 모으고 듣게되는데, 바울은 죄가 없으나 황제에게 보낼 보고서 작성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고 높은 사람 앞에서 심문을 하게된다는 베스도의 연설을 듣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개종 당시 행 9:15 말씀에 주님께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 앞에서 증언하게될 나의 그릇이라”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바울이 아그립바 왕, 유대 총독 그리고 그 지방의 가장 높은 사람들 앞에서 행한 증언을 통해 교훈을 받게 됩니다. 바울이 행한 바울의 생명력있는 증언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증언이 다음 주일까지 연속되는데 오늘은 증언 중 1-18절을 소개받게 됩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1] 서언(1-3)

[2] 예수 만나기 전의 삶(4-12)

[3] 전도자로 변화된 바울(13-18)

 

[1] 서언(1–3)

이제 높은 사람들이 다 앉아서 바울의 말듣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사렛 이단자 바울이 증언하도록 아그립바 왕이 바울더라 말하라고 허락을 하므로 바울은 손을 들어 증언의 답을 열게됩니다. 죄수들이 증언하게 될 때는 증언의 기회주어서 감사하다는 표로 손을 든다고 하는데 바울도 예절바르게 손을 들고서 감사와 예의를 표하고 말을 시작하게됩니다.

바울은 오늘 자기가 행한 증언의 결과에 따라 석방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고 증언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가이사 황제에게 호소해놓았기 때문에, 그는 로마에까지 가야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행한 그의 증언은 두 가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①높은 사람들에게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회를 삼고,

②가이사 황제에게 보내질 보고서에 무죄라는 기록이 쓰여지기를 바라면서 증언했으리라고 봅니다.

그는 본론의 증언에 앞서서 서론으로 아그립바 왕에게 인사말을 하게되는데,

①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언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②그 이유는 아그립바 왕이 유대 종교, 풍습 또 사건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바른 판단이 가능하리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헤롯 왕가의 마지막 왕으로 유대교나 어떤 기독교 사건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③바울은 자기가 행한 증언이 좀 길어지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다 들어주시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2] 예수 만나기 전의 삶(4-12)

바울은 예수 만나기 전의 자기 삶을 증언하므로 자기는 전연 무죄임을 주장하는 반면, 자기가 옳다고 생각했으나 기독교를 핍박했던 일들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와 주님께 죄로 나타났음을 고백하면서 현재 자기를 죄인이라고 잡아 가두고 심문하는 이들도 바울 자신이 옛날에 범했던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음을 인식시켜서, 자기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한다는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4,5절까지에서는 자기는 다소성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예루살렘에 와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고, 더군다나 유명한 가말리아 문하에서 유대교의 정통을 배웠고 엄한 바리새인이었음을 증언하며, 이 사실을 고소자들이 다 아는 사실이라고 고소자들이 부인 못할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에게 이단 교리가 있을 수 없다는 율법에 대해 무척 보수적이었던 자기를 소개합니다.

또 6-8절에서는 모든 유대인들이 조상 때부터 믿고 있는 믿음이 있는데, 그 믿음이란 메시야가 오시어 나라를 세우고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라는 메시야에 대한 소망과 그 메시야가 오시어 죽임을 당하셨다가 다시 살아나심같이 우리도 죽어도 다시 살게될 것이라는 부활의 소망 이것 때문에 내가 지금 옥에 갇혀있고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믿고 바라는 소망이요, 심지어 바울을 심문하는 종교 지도자들도(사두개인을 제외한) 같이 믿고 있는 그 믿음을 자기도 믿고 있는데, 같은 믿음을 가진 자기를 가두어 두었다고 변호하므로 믿음의 전통성을 변호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의 소망이 없는 무리들을 향해서 죄수의 자리에 있는 바울은 더 한층 목소리를 높여서 어떻게 당신들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심을 믿지 못하느냐고 책망까지 곁드리는 담대함을 보여줍니다.

또 9-12절에서는 자기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대제사장들과 협력하여 예수 믿는 사람 잡아가두고 죽이는데 찬성했던 자기였으며,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모독의 말을 하게 하고, 그것으로 분이 풀리지 아니하여 멀리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까지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에 까지 갔던 자기의 과거를 소개하면서 율법주의자로서의 정도를 걸었던 과거의 자기를 변호하게 됩니다.

 

[2] 전도자로 변화된 바울(13-18)

자기가 이전에 그런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나사렛 이단이 되었는지 간증을 하며, 왕과 청중들을 믿게 해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는 다메섹에 가는 길에 대낮 정오의 햇빛보다도 더 밝은 빛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그 빛이 무엇일까요? 주님이시지요. 그러나 함께 한 동행들은 빛은 보았으나 주임을 뵈옵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또 그들이 다 엎드러졌으나 주님 앞에 굴복되지는 않했다는 것이며, 그들이 다 무슨 소리를 들었으나 주님의 참 음성은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빛을 보았고, 소리 즉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누구시냐는 바울의 물음에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말씀에 몸뿐 아니라 마음이 굴복했으며, 그대로 주님임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음성을 들었나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 뒷박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채 뒷박질”이 뭔가요? 소를 몰고 가기 위해 만든 매에 날카로운 쇠붙이를 붙인 것으로 소를 때리면 그 가시채를 뒷박질한다는 뜻으로 뒷박질하면 자기만 피나고 아프지 않겠어요? 그러니 바울이 예수 핍박해봐야 바울만 깨진다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헛된 일 그만하고 항복하라는 것이지요. 지금 핍박하고 있는 지도자들, 즉 왕, 총독, 유대인 지도자들 핍박해봐야 자기들만 깨질 것이므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비유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타나신 주님께서 바울에 형벌을 내리심이 당연하겠으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그를 크게 들어 쓰셔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보내어 영의 눈을 뜨게하고 어두운 곳에 처해 있는 자들을 밝은 빛으로 인도하게 하며 사단의 권세에 있는 그들을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게 하며,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하며, 주를 믿어 하늘나라를 상속받아 영생을 소개하도록 하는 하늘나라의 대사로, 하나님의 종으로 삼으셨다는 간증을 하게 됩니다.

바울을 심판하기 위한 자리이므로 바울이 죄인인데, 오히려 이젠 바울이 하나님의 권위로 그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게되고, 그들은 가시채를 뒷박질하는 죄인의 자리에 서게된 경우로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음성은 무엇인가요? 제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은 다음의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바울은 성도들을 핍박했는데,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을 핍박하는 바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는냐?” 바울이 “주여 뉘시니이까?” 그러자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세상 그 아무도 주님을 핍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고 주님을 미워할 사람 없을 것입니다. 아니 직접 주님께 잡수실 것을 드리고, 마실 것을 드리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소자 중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병든 이웃을 돌보는 것이 바로 주님을 돌보시는 것이라 하셨음을 우리는 다 압니다.

저는 이 본문 말씀이 늘 읽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주님을 핍박하고, 주님께 욕하고, 주님께 마음 아프게 해드릴 수 있었음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작은 주님들이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주님이 어린아이로, 때로는 병든 자로, 때로는 전도자로 나타나시게 될 터인데, 내가 나타나신 주님을 정성을 다해 사랑해야 하고, 어떤 경우도 괴롭혀서는 아니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믿으십니까?

 

두 번째, 바울에게 주신 사명이 ,바로 우리 개인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이란 바울이 기회만 있으면 자기 옥에서 풀려날 생각보다 부활의 주님을 증거했는데, 우리도 영적으로 눈이 감겨 주님을 못 보는 사람 눈을 뜨게 하며,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들을 밝은 빛으로 인도하며, 사단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며,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모두 하늘나라를 상속하는 자들이 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은 주님을 믿게 하는 전도의 선물입니다. 하늘나라에 살도록 소개하는 선물 얼마나 귀한 선물입니까? 이런 선물을 나누어주는 사명을 감당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주님을 사랑하고, 행여 주님을 박대하는 일 없어야 하겠으며, 주님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님 알게 하는 아름다운 발걸음, 아름다운 입술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