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교회 중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진 편지가 오늘 우리에게 소개됩니다. 불행스럽게도 이 교회도 사데 교회와 같이 칭찬은 없고, 책망만 듣는 교회입니다. 잘한 것 한 가지는 있어야 했을텐데 칭찬 받을 일은 하나도 없고, 호된 책망만 받은 교회를 소개받으면서 우리의 신앙이 그럴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 우리 신앙을 점검해 보고 잘못을 회개한다면 이기는 자가 받는 상을 우리 교회 성도들이 받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라오디게아 도시에 대해 좀 생각해 보므로 본문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부르기아 지역의 중심 도시로 특징은 아주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세 개의 중요한 고속도로가 이곳을 통과함으로 빌라델비아와 같이 희랍 문화를 널리 소개하는 그런 도시의 역할도 했으며, 이런 지역적 특성 때문에 재정과 은행들의 센터가 이곳에 있었고, 의류 제조업의 센터가 이곳에 있었으며, 안약을 위한 유명한 의약 학교가 이곳에 있어서 돈 많고, 옷 많고, 눈이 건강해야할 이 도시에 주님께서 역설적으로 가난하다, 헐벗었다, 눈멀었다고 경고를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AD 60년에 지진이 있어서 복구하여야했을 때, 이 도시만은 국고의 보조를 거절하고 자력으로 도시를 복구했던 부자로서의 자부심을 갖는 도시였습니다. 현재의 이름은 에스키헛사로 폐허에 불과한 소촌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지역에 라오디게아 교회가 세워졌는데 골로새와 인접해 있어서 골로새서가 이 교회에도 읽히도록 보내졌고, 또 분실된 서신으로 보는데 골 4:16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진 편지가 있었는데, 이 편지는 또 골로새 교회가 읽도록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교회는 외적 핍박도 없고, 내적으로 부도덕 같은 폐풍이 없었는데 육적으로 부요하다 보니 그것만 의지하고 영적으로는 말라 있고, 육적 번영은 영적 번영의 결과로 보고 축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믿고 살았던 교회에 주님의 엄중한 책망과 경고가 주어진 것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14절 앞부분에 보니 이 편지도 라오디게아 교회의 전도자에게 전달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곧 책망이 소개되겠지만,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이 교회를 토해 버리겠다고 경고를 받는 이 교회의 전도자가 역시 그런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보기 때문에 교인보다 먼저 회개하고, 교인들도 회개시켜 잘 지도하도록 책임을 묻는 의미로 전도자에게 편지라 전달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물론 교인들에게 읽혀지도록 경고 받도록 주어진 편지이며, 이 편지 역시 교회들에게 보내진 편지이므로 온 세계의 모든 교회에게 전달된 편지인데 오늘 우리 교회에 배달이 된 것입니다.
[2] 보내신 주님이 소개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편지를 보내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호칭으로 아멘이신 주님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아멘 이란 “진실” “진리”란 본 뜻으로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이루신 이 즉 “진실”, “진리”이신 이로 표기된 것입니다. 그에게는 거짓이 전혀 없으신 분, 잡것이 전연 없고, 순수한 하나님의 뜻만 이루신 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바울은 “예”되신 주님으로 표현하므로 주님의 말씀에 우리도 “예”되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주님 중심이 떠난 생활을 연결지어 심판대에서 주님께서 본대로 하나님 앞에서 증언하실 거라는 조작은 있을 수 없는, 참된 증인이시라는 것이므로 주님께서 적당히 보아주시겠지 하는 잘못된 기대를 갖지 말고, 생활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경고 같기도 합니다.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이란 세상 제물과 세상 것에 집착하여 하나님에 무관심하는데, 그것을 지으시고 또 영혼까지 지으신 이가 주님이심을 상기시켜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것의 주인이신 주님을 알아야 한다는 교훈 같기도 합니다.
[3] 이 교회에는 칭찬이 없고, 책망만 주어지는데 주님께서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문을 여시는데 좋은 행위를 알고 계신 것이 아니라 나쁜 행위를 알고 계신다고 하니 불행한 일입니다.
네가 차지도, 덥지도 않으니 차던지 덥던지 하라는 것입니다. 미지근하니 토해 내 버리겠다고 경고하십니다. 이 라오디게아 도시는 온천도 있는데 그 물이 미지근하다고 합니다. 먹어보면 마음도 이상스럽고, 미지근하여 토할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 적으로 부요하니 염려가 없고, 안일하다보니 주님에 대해, 영에 대해, 주님의 재림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무관심해져서 미지근한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추어야 옷이 필요한데 미지근하니 옷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차다고 하는 말은 아예 믿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뜨겁다는 것은 잘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 소리 높여 외치는 기도 차라리 차다면 즉 안 믿는 사람이라면 회개하고 믿을 수도 있을 터인데 믿는다고 좋은 프로그램도 많이 갖고, 교회가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있으니 하늘 나라에서 상 받을 것은 보장된 줄 착각하고 있는 이들에게 차라리 불신자가 되던지 뜨거운 신앙을 갖던지 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창기들과 세리들이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리라”(마21:31)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이 책망하시기를 네가 부자라 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나 네 스스로 불쌍한 자신을 모르고 있으며, 얼마나 가난한 자인지 모르며, 눈이 어두어있고, 벌거벗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경고하십니다. 은행 센터가 있는데 주님은 가난하다고 하시며 만약 학교가 있는 이들에게 눈이 어둡다고 하시며, 의류제조 센터가 있는 이들에게 헐벗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좋은 안약을 발라 육의 눈은 밝을지 모르나 영의 눈이 어두었다는 것이고, 세상 적으로는 부자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나라에 쌓아둔 저금 액수도 적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메말라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재물은 있어도 진짜 재물은 없는 헌신도, 헌금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이상 열심을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처방을 내리십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고, 안약을 발라보게 하라는 처방입니다. 참 부유는 주님에게서 오며, 밝아진 눈은 영의 눈은 주님께서 열러주시며 성도가 입어야할 흰옷을 주님에 의해서 믿음에 의해서 입혀진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금은 참 금이 아니요, 자기들이 입고 있는 화려한 옷은 악의 옷이지 의의 옷 흰옷이 못되며 눈을 밝게 한 안약이므로 다시 주님을 찾고 만나 주님의 주시는 부자, 옷, 안약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이나 실은 부요한 자라고 칭찬하셨는데, 오히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인 것 같고, 옷 잘입은 것 같고, 눈이 밝을 것 같은데도 주님보시기에는 가련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헐벗었고, 눈먼 자라고 경고하십니다. 주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회개할 기회를 다시 주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소개했던 교회들에게도 똑같이 보이신 것이 아직도 사랑하시고 아직도 회개하면 기회가 있음을 알려주시고, 회개하여 이기는 자되어 상 받도록 권면과 격려를 아끼시지 않았는데 이렇게 주님을 외면하고 칭찬한마디 받을 수 없는 이 교회를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19절에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느니라 표시하므로 책망과 징계가 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임을 보여 주세며, 살리기 위한 책망, 다시 세우기 위한 징계를 하고 계심을 알리시며, 회개의 문을 열도록 권유하십니다.
[4]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미지근 했으니 다시 주님 사랑, 주님 중심, 하늘나라에 소망을 둔 믿음으로 회복하도록 회개하도록 경고하십니다. 지금 당장 하라고 독려하십니다. 주님께서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준다면 주님께서는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문 앞에 노크하시며 문을 열어주기를 기대하며 계속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으나, 주님께서는 본인이 하실 일을 다 했고, 우리가 해야할 일로 마음 문을 열고 주님 영접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5] 약속입니다.
내가 이기었기 때문에 아버지 보좌에 않은 것 같이 내게 들어오는 그에게는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시며, 성령의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왕 노릇하실 때에 왕과 같은 자리에서 왕 노릇하도록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늘 문을 열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진 편지 중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드렸던 말씀은 주님께서 문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시니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주면 들어가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편지는 불신자에게 주어진 편지가 아니라 잘 믿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자, 즉 말하자면 예수 잘 믿고, 예수 전하고 있는 전도자에게 천사가 와서 예수 믿고, 구원 얻으라고 하시는 말씀과 똑같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예수를 내 속에 영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 믿는다고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 믿는 길은 나 죽고 예수가 내 안에 사는 길인데, 나 살고 예수 내 쫓은 신자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위해 가난해져야 하고, 예수 위해 내 생활 희생해야 하고, 예수 살리기 위해 내가 더 죽어야 하는데, 내가 지식이 늘어나고, 내가 부자되고, 내가 잘되고 하다보니 자만해지고, 주님께 매달릴 필요가 줄어들고, 주님 잊게되고, 현재 나의 번영은 즉 잘 믿는 축복의 결과로 착각을 하고 이대로 좋다고 믿고있는 믿음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로 보자면 세상이 갖출 모든 것 다 갖추고 세상 교회가 할말 다하고 있으나, 자기 교회가 잘 믿어 하나님께서 그렇게 축복해 주는 줄 알고, 꼭 그대로만 진행해 나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태에서도 교만은 자만은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스스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큰 헌금을 하고, 큰 헌신을 하고, 어찌 보면 자랑할만한 일을 했더라도 내 생명을 살리신 은혜와 비교하여 늘 빛 진자로서의 마음을 갖고, 순간도 주님 없이는 아니 순간도 주님 생각하며 사는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고, 산 자도, 불신자도 지금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을 맞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에 부자라는 부러움을 사기보다는 내게 비록 돈은 없지만 네가 참으로 부요하다는 칭찬을 받고 우리가 돈만 알고, 사랑, 기쁨, 확신, 안전, 소망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세상의 사치스런 옷보다 주님이 주시는 성도의 옷, 의로운 옷 입고, 주님이 주시는 바른 눈을 가져 무엇이 더 중요한지 바른 가치관을 갖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이긴 자에게 주님 오실 때 왕좌에 앉히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왕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심과 다름없습니다. 모두 이기는 자되어 왕이 되는 축복 받으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