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 중 오늘은 다섯 대접 재앙을 소개받게 됩니다. 이 대접 재앙은 앞에 있었던 인의 재앙이나 나팔 재앙에 비해 훨씬 강한 끔찍한 재앙인 것입니다. 즉 전 3년 반에 있으리라 예고된 심판보다 이 후 3년 반에 전개될 재앙은 혹독한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재앙, 이 심판이란 지옥에서 받을 어떤 형벌이 아니고, 양과 염소를 갈라놓기 전에 혹시라도 회개시켜 볼까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기회요, 채찍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본문 1~11절까지의 대접 재앙을 소개하기 위해서 3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5대접 재앙의 특성
[2] 5대접 재앙의 소개
[3] 재앙 받는 자들의 태도
[1] 대접 재앙의 특성
(1) 준비된 심판입니다.
1절에 보니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쏟으라는 명령을 받는 일곱 천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일곱 대접 심판이란 쏟아지게 만발의 준비되어 있는, 명령만 기다리고 있는 당장 있고야만 필연적인 심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말이 오기 전에 있어야하는 심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불신자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입니다.
2절에 보니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내려진 것임을 보게됩니다.
(3) 의로운 심판입니다.
6~7절은 보니 “이렇게 심판하시나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선지자들과 성도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인간이 보복을 하고 원수 갚는 것은 하나의 분냄이요, 죄가 되나 하나님께서 심판 날에 악인들에게 엄한 벌을 내리심은 오히려 의로우시며, 참되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인들이 그런 심판을 받을 줄 알면서도 성도들의 많은 피를 흘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은 순교자들의 호소에 대한 응답이요, 불공평이 정당하게 갚아지는 심판이므로 의로운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4) 나팔 재앙은 3분의 1에 일어났으나, 보다 넓고 깊은 재앙입니다.
[2] 5대접 재앙의 소개
첫째 대접을 땅에 쏟으매 독한 종기, 악종 부스럼이 불신자들에게 나타난 재앙입니다. 출애급기9:9-11의 재를 날리니 재가 애굽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독종이 온 애굽에 발생했으므로 모세와 함께 능력을 겨루던 술 객도 지기에게 난 악성 독종 때문에 모세 앞에 서지 못했던 그런 독종입니다. 통증은 가시게 할 수 없는 어떤 치유의 길이 없는 독종인 것입니다.
둘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피같이 되고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7:20에서 모세와 아론이 지팡이로 하수를 치니 그 물이 피로 변하고 하수의 고기가 죽고 나일강 물이 피로 변하였습니다.
셋째 대접을 강에 쏟으매 물이 피가 되더라. 바다가 죽게됨에 따른 많은 고통과 물 근원, 식염의 오염, 사람이 고통, 씻을 물, 먹을 물, 음식 만들 물로 피 물을 마시고 써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넷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더 뜨거워져 그 불로 사람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졌다는 것입니다. 인디언 섬머에도 더워 힘든데 사람이 태워진다니 겁나지요? 나팔 재앙에는 해의 3분의 1이 어두워졌던 천체의 변화였는데 여기서는 더 뜨거워진 천체의 변화입니다.
다섯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매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 정도였다는 기록입니다. 짐승의 보좌란 마귀 즉 사단의 보좌입니다. 사단의 소굴의 사단의 본부 Headquarter, 짐승의 보좌란 하나님의 보좌에 대응하는 표현이 되겠습니다. 여기에 쏟아버리니 그 나라가 어두워졌다는 말은 완전히 세력을 잃었다 힘이 완전히 소멸됐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아프게 되는데 얼마나 아픔을 느끼든지 자기 성질에 혀를 깨물 정도로 아팠다는 것입니다.
[3] 재앙을 받는 자들의 태도
종말이 와버리지 않고 여섯 인의 재앙, 여섯 나팔과 재앙, 일곱 대접의 재앙을 주시는 것은 악은 망하고 선은 승리한다는 최후의 결과에 대한 예고요, 그런 종말이 오기 전에 죄악을 벗어나 선에 속하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즉 구원받을 기회를 최후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비를 악인에게 내리신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 참으심을 통해 Chance를 붙잡기는 커녕, 회개하지는 않고 이런 재앙을 받은 자들은 오히려 9절에 보니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회개치도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11절에도 아파 죽겠으니 오히려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우리더러 어떻게 신앙 생화릉 하라고 이 말씀이 주어졌는가요? 제가 받은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에 원수갚는 일을 맡기는 삶을 살라는 교훈입니다.
인간이 원수갚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으로는 내게 원수되는 사람까지라도 사랑하여 그가 회개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도 내게 죄지은 모든 사람에게 원수갚는 계획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판장이 재판하는 때가 오게 되겠는데 그 분의 재판 때에 명명백백히 들어 나서 승리자는 승리로, 망한 자는 망하게 시원스럽게 해결해 주실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심은 의로운 것이나, 내가 원수갚는 것은 악이요, 정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을 자에게 고통으로 보상해 주시겠다는 공의로운 심판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조금만 참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준비된 심판, 아니 준비된 상은 받을 자에게 예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면 다 끝나게 될 터인데 내가 원수갚느라고 그 화로 나를 불태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수도 갚아주고, 또 선을 행한 자에게만 억울한 것, 핍박, 순교, 선을 위해 수고한 모든 것에 대해 만족한 보상이 주어질 때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행여나 옳고, 그름이 흐릿하게 판단되어지지 않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의로운 심판, 행위대로 갚는 심판, 하나님께와 인간에게 무례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에게는 합당한 상을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라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는 내게 기쁜 일도, 슬픈 일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계획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왜 내게 이런 기쁨을 주신는가? 생각하고 늘 회개하며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 만나도 믿음으로 하나님 생각하여 잘 견디면 연단이 되나, 본문에서와 같이 재앙 받은 자들이 회개치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아니하며, 좀 어렵다고 불평하고, 낙담하여 오히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대든다면 이것은 연단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재앙이요, 저주가 되고 말 것입니다. 다섯 재앙 받은 자들은 그 재앙이 내린 이유를 생각하고 마땅히 회개했어야 했음에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훼방했다니 인간들이 악을 버리지 못하고 더 악한 행위로 최후의 심판을, 영원한 벌을 스스로 끌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주어졌을 때 그 뜻을 알고 하나님께 더욱 감사와 영광 돌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교만으로 변하거나 그 기쁨 자체가 우상이 되어 그 기쁨은 오히려 그에게 저주가 되는 벌을 가져오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즉 내게 내리신 뜻이 무엇인지 늘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왜 그 자리에 서게 했는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미국에 오게 했는지, 왜 이 교회에 오게 했는지, 왜 그 가정에 태어나게 했는지 다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 졸업하고, 잘먹고 잘살라는 축복이 전부가 아니고, 아니 남편에게 버림받고 진탕 고생하다 세상을 떠나는 그 고통이 전부가 아니고,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서 요구하시는 뜻에 따르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그럴 때 모든 환경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복 받은 자 입니까? 남편 잘 만난 자? 돈 있는 자? 지식이 있는 자? 복을 세상 복으로 결론 내리지 말기 바랍니다. 지난 주에도 강조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전까지는 누가 복 있는 자라고 누가 불행한 자라고 점찍지 말기 바랍니다. 거지 나사로가 복 있는 자라고 누가 세상에서 생각을 해봤겠습니까? 우리의 최후의 목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 그 무엇 때문에 우쭐하지 맙시다. 아니 내게 없는 것 때문에 풀이 죽지 맙시다. 날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헤아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