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요한계시록 22:6-21

오늘 설교 제목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주님께서 계시록 강해의 시작을 주셨고 오늘 계시록의 마지막 강해를 주시게 됩니다. 계시록은 성경의 맨 뒷부분인데 다 마치게 되니 세상 맨 끝 벼랑에 와 있는 기분이기도 합니다. 본문 10절에도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계시록 강해를 성도들에게 해드리지도 못하고 주님이 재림하셨다면 전도자의 책임을 다 못한 부담감을 갖게 되겠으나 다행이 오늘로서 재림 전에 되어질 일들, 또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복된 생활 등 마땅히 알려져야 할 계시를 다 소개해 드렸으므로 주님이 다음 주에 오신다 해도 책임감이 줄어드는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계시록 강해 시작부터 끝까지 계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셨음에 무한히 감사드리며 오늘 계시록 결론 부분을 소개해 드리게 됩니다.

계시록 마지막 부분인 본문 6~21절까지를 보면, 몇 개의 주제를 가지고 결론 부분을 구성하고 있음을 보게됩니다.

[1] 예언의 말씀

[2] 속히 오실 주님

[3] 우상 숭배한 뻔한 요한

[4] 성안에 들어올 자와 성밖에 있을 자

[5] 초청

[6] 말씀의 순수성

이 6가지의 주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언의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6절에 보니 “이 예언의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장부터 21장까지 기록된 모든 말씀은 틀림없이 일어나고야 말 것을 예언한 것이요, 조금도 오차가 없이 지켜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다윗의 뿌리이시며 광명한 새벽 별, 주 예수께서 교회들을 위하여 사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이라고 확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이실 것이니, 주님의 말씀이시니 신실하고 참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1장 3절에서 약속한 것을 다시 반복하여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고 예언의 말씀이란 복을 위해 있는 것으로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죄인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소개되는 두려움의 예언이 되겠지만 성도들에게는 복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명령되었으니,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예언의 말씀들이 전파해야 하는 책임을 주었으며 속히 오실 주님을 예비케 하기 위해 긴박감을 갖고 전파해야 하는 조급한 분위기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2] 속히 오실 주님

계시록 1:1에 보면 계시록에 기록된 사실은 속히 되어질 일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이 계시록이 기록된 연대가 AD95년경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쓰여질 때, 그 당시 사람들이 피부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남음을 느끼고 있었고 세상 분위기 징조가 주님의 재림의 때를 충분히 느끼게 했었습니다. 예언서가 기록되기를 말세의 인, 또 새 하늘과 새 땅의 일이 언제 되어질 일이라고요? 속히 되어질 일. 계시록에 이미 “내가 속히 오리라”라고 여러 번 강조되었는데, 22:7, 12, 20에 내가 속히 오리라는 약속이 반복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글 성경에는 “속히 오리라” 라는 표현이어서 미래형같이 느껴지지만 희랍어 원어에는 현재형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I come 이지, I will come이 아닙니다. 주님이 교회 세우실 때는 I will build my church로 수년 내에 세워질 교회는 미래형을 썼지만, 2천년 지나서 되어질 일을 현재형 I am coming로 말씀하십니다. 앞서 말한 대로 주님이 하신 말씀이시니 예언의 말씀은 참되고 신실함이 사실인데 “나 지금 간다, 지금 가고 있다” 고 말씀하신 그 분이 2천년이 걸렸으나 아직 오시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개념으로는 “나 지금 간다” 입니다. 지금 오신다는 말씀을 신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오늘 저녁, 내일 오실 지 모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시는 이유가 뭐여요? 12절에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행위대로 갚아 주시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3] 우상 숭배할 뻔한 요한

9절에 보니 사도 요한은 계시를 보여주는 천사가 어찌 위대해 보이던지 자신도 모르게 천사 앞에 꿇어 엎드려 경배하려고 했는데, 천사가 자기도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할 종에 불과하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명확히 고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하는 천사가 거룩해 보이고, 위대해 보이고, 경배하고자 하는 그 어떤 위엄이 있다는 것 때문에 사도 요한이 우상 숭배할 뻔했는데 다행이 참 천사를 만나 잘못을 교정 받았습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지도자들을 주님보다 더 섬기는 예가 많고, 또 그런 대접을 받으려는 사이비 지도자들이 말세에 많이 가능하다고 말세를 당한 우리에게 바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세례도 받고, 직분도 받고, 신앙 생활 잘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죄 사함 확신 없는 잘못된 신앙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 위한 믿음 아닌, 또 재림의 소망 없는 신앙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4] 성안에 들어올 자와 성밖에 있을 자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올 수 있는 자의 자격에 대해 강조되어 지고 있는데, 그럴때마다 꼭 들어오지 못할 자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4절에 보니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고 새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생명나무 과일을 먹게될 자격자로 두루마기를 빠는 자, 즉 흰옷을 입은 자들로 소개합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란 주 예수를 통해 죄 사함 받고 의로워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14절에 흠정역 판 같은 어떤 사본에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권위 있는 사본은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라 표기되어 있다고 합니다. 주 예수를 통해서는 새 예루살렘 성의 동서남북 열두 개의 문들을 통해 입성하게 되나, 반대로 개들, 누가 개입니까? 이방인 불신자입니다. 주님 믿지 아니하고, 주님 의지하지 아니하고, 교만한 사람을 표현한 험악한 표현이지요. 믿는 자는 존대를 받으나, 불신자는 개 취급을 받게 됩니다. 개나 술객들이나 행음자들이나 살인자들이나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 말하는 자들은 성밖에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21장에서도 두 번이나 강조되었는데, 결론 부분에서 또 한번 성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아우성대게 될 거룩한 성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5] 초청

17절에 보니 “오라”는 초청이 있습니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며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초청장이 보내지고 있습니다. 만민에게 주어진 보내진 이 초청장에 의해 예언의 말씀을 닫고,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자는 값없이 들어올 수 있다는 보장이 주어집니다. 돈 받지 않은 초청장, 입장권, 무료 입장권이라 보통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싼 입장권은 가치 있게 생각하게 되지요? 무료 입장권을 존중하는 자, 주님의 초청을 정중히 귀히 받아드리면 영생을 받을 것이고 초청을 무시하는 자들은 성밖에서 개 취급을 받게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6] 말씀의 순수성

18, 19절에 보니 누구든지 예언의 말씀 외에 말을 더 붙이면 하나님께서 내리시기로 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또 기록된 말씀을 빼내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 과일 먹는 권리를 뺏어버리고 거룩한 성에 들어갈 자격을 박탈해 버리겠다는 경고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 더하거나 빼지 말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의견을 내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인간을 의로 교육하기에 충분하고 만족스런 완성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길 안내가 100% 잘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즐겁게 할 일, 하나님 섬기는 방법이 완벽하고 자상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더하거나 빼면 뭐라 할 수 있겠어요? “이단”이라 보아도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카톨릭 성경에는 외경이 들어있고, 몰몬교도 몰몬경, 여호와의 증인은 파수대라는 자기들이 써둔 글을 강조, 안식교도 역시 많은 인쇄물, 또 정통이라는 교단들의 사역자들도 자기들이 받은 계시, 꿈을 얘기합니다. 성경 외에 무엇을 보았고 받았다면 계시록 22:18, 19을 범하는, 하나님의 성경 무시하는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의 순수성, 교리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지만 현실이 어떻고, 문화가 어떻고, 교인들이 싫어하고, 교인들이 좋아하고, 우리 교단 교리가 어떻고 하는 성경 외에 다른 뭐를 강조되고 또 빼내는 자들에게 심각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받은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일상 생활을 주의 재림과 새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일에 다이얼을 맞추어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도, 목표도, 삶의 의의도 주의 재림과 성안에 들어가 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신 목적이 그렇고, 성경이 쓰여진 목적이 그렇고, 계시록의 주제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모든 것이 신실하게 참되다고 강조되었습니다.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신실됨의 신용도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가 다시 오시되 속히 온다, I come 지금 오신다고 선포하시고 계십니다. 각자가 행한 대로 상을 주시려고 갚아 주시려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즐겁게 하는 일이었습니까?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이었습니까? 하나님 위해 사는 삶입니까? 나 위해 사는 삶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한 말씀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며 그 말씀에 더하거나 덜하지 않기 위해 말씀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 성경은 어떻든 교회 성장이라는 이유 붙여 내 의견을 얼마나 더 붙이고 또 기록된 말씀을 빼내고 있습니까? 주님 목소리 보다 내 목소리, 교회 지도자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더 크게 들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초청하고 계십니다. “오라!” 듣는 자는 오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오라 하십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바라는 자는 오라는 초청입니다. 지금까지 안 믿는 자도 오고, 교회 핍박한 자도 오고, 지금까지 말씀에 가감한 자도 다 회개하고 오라는 초청입니다. 지금 나아오라는 초청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지금 속히 오시기 때문에 미루지 말고 지금 오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하고 목말라 한자는 지금 곧 오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모든 죄 사면하고 받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 죄를 자기 잘못을 재산 공개하듯 진심으로 공개하는 자는 앞으로 검찰의 사정의 칼날이 없으려니와, 위장 공개한자는 사정의 칼날에 꺾여 감옥에 들어갈 것이라고 지금 잘못을 자백하고 그리스도 통해 거듭 나가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주님께 오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의 성에 입성하기 위해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지금 오라”는 주님의 초청에 모두 응하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내가 속히 오리라 내가 속히 온다” 는 말씀을 듣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응답을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내가 속히 온다”는 주님의 음성을 매일 듣는 귀 가진 성도들 되시고, 그 음성 듣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쁨으로 맞을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