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독교를 성서적으로 이해하는 편에 들것이고 반대로 히브리서를 잘 이해 못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신약과 구약의 관계를 잘 이해 못하는 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히브리서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관계라든지 구약과 신약의 구별을 명확하게 해주는 책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관계를 잘 풀어주고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해 보다 친밀감을 갖게 해주고 더욱 그리스도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함으로 우리들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성도들의 형제 되신 그리스도(11-13) [2]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그리스도(14-16) [3]성도들의 대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17-18)입니다.
[1]먼저 11절부터 13절까지의 성도들의 형제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함께 신앙 생활하는 분들끼리 형제나 자매라고 서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그런 호칭이 대접을 받지 못하고 교회 내에서도 사장님이나 장관님 같은 사회적인 신분이나 또는 교회의 직분인 목사님, 장로님이란 호칭이 대접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잘못된 습관과 관념을 고발하는 본문이 되겠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존재요 하나님과 한 몸 되신 하나님의 존재이셨으나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이라는 직분을 가지시고 세상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시되 세상에 사는 인간만큼 낮추신 것입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이신 그리스도가 인간만큼 낮아지셨음을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밝혀주고 있습니다.
11절을 보니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인간이 다 같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성도들도 하나님에 의해 영적으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성도들도 하나님의 아들딸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아들딸들이라면 예수님과 우리들은 바로 한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한 형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두고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한 아버지에서 태어난 성도들의 형제라는 강조인 것입니다.
12절에서는 한 형제인 그리스도나 성도들이 하나님께 같은 예배를 드린다고 강조하므로 그리스도와 성도가 같은 신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교회에서 찬양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주님께서도 교회 중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시겠다고 하므로 그리스도와 성도들은 동일한 예배를 드린다는 접을 강조하므로 한 형제임을 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이사야서 8장 17절 18절을 인용한 것으로 주님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또한 성도들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주님도 구원된 자요, 그리스도인들도 구원된 자들임을 강조하므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은 다 같은 형제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두 번째는 14절부터 16절까지의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4절부터 16절까지에서는 육체를 입고 있는 인간과 같이 주님께서도 육체를 입고 오신 점을 강조하므로 육신을 입은 자들의 친구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신분을 낮추시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것은 인간의 약점을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약점이란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와 그 죄의 삯인 사망의 문제를 풀어주기 위해 오셨다고 했습니다. 사단이 쥐고 흔드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부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 누구나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데 영생에 대한 소망을 믿게 함으로 사망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려 오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천사들은 사람들보다 일시적으로 더 높은 지위로 태어났지만 주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신 것은 천사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오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오신 것이라 했습니다.
[3]마지막으로 17절부터 18절까지의 성도들의 대 제사장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양을 잡아 죄를 대속했으며 대 제사장이 매년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단번에 인류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17, 1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맛보시고 인간의 약점인 죄의 문제와 모든 고통의 문제를 친히 경험하신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비하고 충성된 대 제사장이 되어 인간의 죄와 고통과 사망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시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였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하여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셨던 주님의 희생적 사랑을 바로 이해하라는 교훈이며 또한 주님의 희생적 삶을 본받으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신분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고통과 모든 문제를 풀어주시기 위해 인간이 당할 모든 것을 스스로 체험해보신 것입니다. 인간과 같은 위치에서 형제가 되시기 위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희생양이 되신 분이십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왕의 신분에서 종의 신분을 택하셨다는 것은 절대적인 사랑이십니다. 또 인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은 역시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런 절대적인 희생과 사랑에 힘입어 우리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 자체에서 주님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정성을 쏟아서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참 사랑을 바로 이해한다면 보다 적극적인 신앙 태도를 보일 것으로 믿습니다. 주님의 참 사랑을 바로 이해하고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라는 교훈입니다.
둘째로는 역시 주님의 희생적인 삶을 본받아 낮은 자리에 처할 줄도 알고 희생할 줄도 아는 신앙인들이 되라는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작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남을 위해 내 위치를 낮출 줄도 알고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질 줄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들이 왜? 시끄럽습니까? 자신을 낮출줄은 모르고 남을 낮추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자기가 희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살리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려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당연히 남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며, 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을 무시하고 남을 희생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몫이 아닌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인데 목이 곧고 높아진 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에 적합하지 못합니다. 영생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인데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자신을 살지게 한 기름진 체질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하나님이란 신분대신 형제라고 낮추심이나 또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 같은 낮춤이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높은 자나 낮은 자가, 나이 많은 자나 나이 적은 자나 다 같이 하나님의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자신의 분명한 위치를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역시 내 이웃을 높이기 위해 자신들을 낮추며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