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신 본문에서는 마땅히 겸손해야할 교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망각하고 교만하여 교회 지도자들을 평가하는 실수를 시정하도록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10여년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목사님이 자기 집을 샀는데 집을 산 그 목사님을 두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배당을 먼저사야지 자기 집을 먼저샀다는 것이었습니다. 얼핏 듣기에는 그 말하는 사람이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같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그 말이 내 기억속에 있다는 것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생활과 그 말의 상관관계를 놓고 많이 생각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의 말이 그럴듯합니까? 그 당시에 그 말을 하는 사람도 자기 집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배당은 온 교인들이 힘을 합해서 사는 것이지 어찌 목사님 혼자사야하겠습니까? 그러나 교인들은 그렇게 쉽게 교역자들을 두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고린도 교인들이 여러 교역자들을 두고 누구는 능력이 있고 누구는 능력이 없으며, 누구는 마땅히 존대를 받아야 하고 누구는 천대를 받아야 한다고 교역자들을 놓고 판단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지적하며 시정을 요구하는 권면이 주어집니다. 본문의 요지는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난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 잘낫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잘나게 만든 것이므로 너무 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전도를 위해서 못먹고 헐벗고 매맞고 비웃음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 교인들은 짐을 나누어 지거나 고난을 나누지 아니하고 오히려 교회 지도자들을 평가하는 자리에 서서 교만을 부리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 성도들이 우리들에게 주고자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전달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사는 성도다운 삶을 사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사도 바울과 아볼로가 본을 보여줌(6) [2]교만하지 말라(7-8) [3]사도들의 처지(9-13)입니다.
[1]맨 먼저 6절의 사도바울과 아볼로가 본을 보여줌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류의 스승이 있고 그들의 가르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스승은 말로만 가르치고 자신은 생활에서 실천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나는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잘 먹혀들어갈까요? 자신은 자신의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녀들이 자기에게 효도해주기를 바란다면 자기가 바란대로 되기가 쉽지 않겠지요? 언젠가 래듸오를 들으니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도록 많이 권하나 실지로 의사들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기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이 적다는 통게가 있다고 하더군요. 담배를 피우면 건강에 나쁘니 담배를 피우지 말라하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피우고 있는 가르침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6절에서의 말씀은 사도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인들이 어떤 태도로 살아야할지를 가르쳤던 교훈을 자기들의 생활에 적용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 위대한 지도자들이지요? 이미 사도 바울이나 아볼로를 통해서 전달받은 성경적 교훈을 그대로 실천하고 그 말씀을 거역하지 말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과 아볼로가 자신들의 종된 신분을 바로 깨닫고 또 다른 동역자가 가진 은사를 인정하고 그 은사들을 각자 사용하고 협동하여 맡은 바의 일에 충성하였던 모범을 기억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훈으로 가르치고 또 생할로 모범을 보였는데도 왜? 지도자의 모습을 닮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같이 행동하느냐는 권고인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7-8절의 교만하지 말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몇가지의 질문을 통해 훈계하고 있습니다. 누가 너희들에게 교회 지도자들이나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하더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잘났다고 하는데 누가 너희들더러 잘난 자들이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남이 갖지 않은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마치 누구에게서 받지 아니하고 처음부터 자기가 가진 것 같이 자랑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을 우리들에게 물어도 되겠습니다. 돈이 많아 교만한다면 그 돈을 누가 주었는데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지혜나, 명예나, 그 어떤 것을 우리가 가졌다 하더라도 그 가진 것 때문에 내가 교만해져서 남을 깔볼 이유가 전연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빌려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실지로 렌트 인생입니다. 재산도, 집도, 지혜도 목숨도 다 하나님으로부터 렌트해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렌트 인생임을 알고 사는 사람은 마땅히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렌트 인생임을 모르고 집이나 돈좀 가졌다고 자기 집인줄만 알고 부자인척하고 있으며 권력이 좀 있다고 하여 진짜 권력자나 된 것같이 왕같이 권력을 휘두르는데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 같이 이 세상에서 왕노릇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님의 나라에서 진짜 부자가 되고 진짜 왕노릇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3]세 번째로 9절부터 13절까지의 사도들의처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9절부터 13절가지에 있는 사도들의 처지와 현세 교회 지도자들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중심한 가도들의 위치와 실지로 당한 처지를 고린도 교회에 소개하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교만하지 말고 사도들의 처지를 이해하여 사도들의 처지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을 억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사도들이란 하나님께서 맨 밑바닥에서 종사리를 하거나 또는 죽도록 대기시켜놓은 신분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ㄱ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후해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듯이 사도들도 야외 원형 극장에서 사나운 짐승들에게 던져저서 찢기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구경거리의 연출자로 예정된 자들로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사도들이 그런 구경거리의 연출자가 되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심지어 믿는 성도들에게도 사도들의 신분이 전연 위로 받거나 함께 무거운 짐을 나
누어 져주는 그런 형제애나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고 함게 소망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동질성를 느끼지 못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심정을 털어놓기를 사도들은 주님 때문에 세상의 지혜를 다 버리고 불신 자들이 눈에 많이 어리석은 자가 되었나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지혜로운 자들같이 되었고,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힘이 없는 약한 자가 되었으나 교인들은 세상적으로도 강한 자들이며,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 눈에도 존귀하게 보이나 사도들은 주님 때문에 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눈에 천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사도로 부름을 받은 때부터 이 편지를 보내는 순간까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요즘 세상에도 복음 때문에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동하는 주의 종들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들의 처지를 더욱 소개합니다. 12절에 보니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생활을 자급자족해야 하기 때문에 손수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저주를 하면 그들을 위해 축복으로 갚았다고 했으며, 핍박을 당하면 참았고 비방하는 자들에게 좋은 말로 되갚았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 생각해 보아도 자신들은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는 쓰레기나 더러운 것같은 존재밖에 다른 어떤 대우도 없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런 사도 바울과 같은 훌륭한 교회 지도자들을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는 부끄러울 것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이 언제 예수님 때문에 할벗고 굶고 매를 맞았으며 핍박을 받고 비방을 받았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남들에게 얼마나 천하게 되었습니까? 언제 예수님때문에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과연 우리를 저주한 자들을 축복했으며, 우리를 비방한 자들에게 좋은 말로 되갚았는지 부끄러울 뿐입니다. 우리도 마땅히 사도 바울의 고난을 나누어져야 하는데 고린도 교인들과 같이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잘먹고 잘살고, 명예롭고 대접받으며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때문에 헐벗고 못먹었으나 우리들은 예수님 때문에 오히려 잘 살고 있으니 사도들의 생활과 비교해서 너무나도 사치스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행여나 내가 잘나서 잘먹고 잘입으며 내가 잘나서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가난하고 지혜가 없고 명예도 학식도 가진 것이 없는 자를ㅇ 깔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소망은 이 세상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자랑하고 뽐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요 비록 사도 바울 같이 이 세상에서 찌꺼기같은 대우를 받아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락을 소망하며 사는 생활이라야 하나님께 보장된 삶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공평의 하나님, 보상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그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남과 비교해서 더 나은 것이 있으면 자기가 잘낫다고 생각 되고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몸매가 날씬하고 인물이 잘난 미녀가 얼굴도 못생겼고 뚱뚱한 몸매의 여자를 보았을 때 에 어떤 생각을 갖게 될까요? 유식한 자들의 모임에 못배운 자가 있을 경우에 못배운 자가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요? 부자 동네에 몹시 가난한 사람이 산다면 그 가난한 자를 보는 부자들의 시선은 어떨까요? 서울의 좋은 호탤에 찌그러진 82년도 스테이션 웨곤을 갖다대면 호텔 종웝원들이 어떤 대접을 할 것 같습니까?
우리들이 가끔 온 몸을 비틀고 걸음을 걷는 몸이 불구인 자들을 가끔 보는데 그런 사람이 여러분의 친구라면, 여러분의 형제라면 여러분의 부모나 자녀라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어떤 자리에나 동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유명한 사람이나 잘난 사람과 함께 걷는다면 뽐내지겠지요? 좋은 새 차를 타고밖에 나가면 우쭐해지겠지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을 새로 샀으면 자랑하고 싶겠지요? 집이 험하면 누가 자기 집에 올까 무서워하고요. 이런 것들은 인류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지만 크리스챤들은 차원을 달리하는 다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졌고 남보다 월등하게 잘났다고 스스로 평가가 되더라도 그 결과로 남을 깔보아서는 아니되며 우리들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두고 차별해서는 아니된 다는 말입니다. 불구자이건 잘난자이건,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검거나 희거나를 두고 차별해서는 아니된 다는 말입니다. 교만해서는 아니될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만할 것이 전연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해서는 아니된 것은 우리들을 위해 못먹고 못입고, 매맞고 약하고, 비천한 자리에서 고난을 당했고 당하고 있는 영적 지도자들을 생각해야하기 때문에 교만해서는 아니된 다는 것입니다. 교만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못가진 자와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이 있는 자가 가난한 자와 가진 것을 나누고, 눈이 있는 자가 눈이 없는 자와 눈을 나누는 공동 사회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이 성도들이 가져야할 마땅한 태도인 것입니다.
온 성도들이 언제나 겸손하여 누구나 존경하고 사랑하며 나그네 같은 이 세상 생활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천국 생활을 다 누리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