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구별된 생활 – 고린도후서 6:11-18

미국에 살다보니 음력 명절에 대한 정서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음력설의 정서란 떡방아간이나, 기차역, 고속버스터미널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새해 새 희망을 갖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는 수요일인 28일이 음력설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음력설을 맞게 되는 성도들에게 적절한 말씀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세상과 구별된 생활인데 음력설이라고 한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토정 비결을 보고 금년 운수를 알기 위해서 용한 사람을 찾는다거나 제사지내는 일을 하거나 노름판을 벌린다거나 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처신을 해야 한다는 교훈이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인 것입니다. 구별된 삶을 살아 자기를 성결하게 지킨 자를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로 영접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우리 성도들이 일상 생활을 살아나가면서 성도로서의 마땅한 처신을 잘 하시므로 칭찬 받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마음을 넓히라(11-13) [2]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14-18)입니다.

 

[1]먼저 11절부터 13절까지의 마음을 넓히라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본문의 요지는 사도 바울은 복음을 고린도 교회에 전파한 영적인 아버지의 입장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잘못된 변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용납하고 있는 사도 바울 자신의 마음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너그러운 마음을 갖듯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넓은 마음을 가지라는 주문인 것입니다.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었다고 소개합니다. 입이 열렸다고 하는 말은 하나도 숨김없이 다 말을 했다는 말이며 마음이 넓었다고 하는 말은 고린도 교인들의 어떤 변신에도 상관없이 용서하고 이해하고 받아드릴 수 있는 넒은 가슴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맞을 때에 큰 잔치를 베풀어주었던 큰마음과 같은 맥락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넓은 마음을 소개하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마음을 넓히라고 호소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큰 잘못에도 불구하고 관용을 베풀었던 것에 대한 보답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에게 넓은 마음으로 대해달라는 호소인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호소를 보면서 사도 바울은 정말 넓은 가슴을 가졌다고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도 배신한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호소하되 집을 나간 자녀에게 돌아오도록 호소하는 아버지의 가슴을 가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아주 작은 일을 가지고 전도자가 교인을 오해하고 관계가 멀어지기 쉽고 또한 교인들도 어떤 작은 때문에 전도자를 오해하고 거리를 두고 처신하게 되기가 쉬운데 이런 전도자들과 교인들에게 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까? 마음을 넓히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이해한다면 교인들끼리도 정말 시시한 일 때문에 서로 다투고 비난하며 교회에서 만나도 서로 눈을 피하고 성도로서의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소한 문제가 아니고 큰 실수를 했다하더라도 넓은 가슴으로 용납하는 것이 성도로서의 마땅한 처세라고 교훈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나요? 죽을죄를 지었던 우리들의 죄를 다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무엇이라 했나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입니다. 이 말을 역으로 바꾸어 본다면 우리들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시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 않는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넓히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넓히시지 않는다는 교훈이므로 우리는 남을 위해서 마음을 넓히기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마음을 넓혀야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마음을 넗히지 못해서 얼마나 시끄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보통 이런 일을 겪으면서 뭐라고들 하나요? 세상 사람들은 술 한잔씩 하면 다 풀어지는데 믿는 사람들은 한번 틀어지면 도대체 풀어지지 않는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생활 첫째가 뭐여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술을 한잔 마시지 않아도 상대방을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넓은 가슴을 갖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두 번째는 14절부터 18절까지의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성도가 마땅히 세상과 구별된 생활을 하므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2:10에 보면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라 했습니다. 이 말은 소와 나귀는 본성이 전연 다르므로 한 멍에에 메서 밭을 갈지 말라한 것입니다. 걷는 습성이나 일하는 습성이 전연 다른 소와 나귀를 함께 묶어 밭을 갈게 한다면 호흡이 맡지 않아 밭을 잘 갈 수 없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자신을 성결하게 지키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믿지 않는 자들과의 만남에서 자신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불신자들을 전연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압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모든 일을 자기들의 습성대로 하기 때문에 믿는 자가 불신자들의 습성대로 모두 따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사귄다해도 성도가 지킬 자기의 위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소와 나귀가 전연 습성이 다름같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소망이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이나 믿지 않는 자는 그들의 소망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며 믿는 자는 자기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던지 자기의 주장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 믿지 않는 자는 모든 일을 자기 주장과 자기 고집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는 남에게 선을 베풀어도 하나님의 것으로 베푼다고 믿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나 불신자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남을 돕는다고 믿고 자기가 영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또 믿는 자는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믿으나 불신자는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믿으며, 믿는 자는 자기를 낮추어야 높아지는 것으로 아나 불신자는 자신을 높여야 높아지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또 믿는 자는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믿으나 불신자는 원수를 미워해야 마땅한 것으로 믿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는 자와 불신자는 사상과 철학과 도덕의 기준이 서로 너무 다르기 때문에 멍에를 같이 메고 밭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결혼하여 함께 산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일마다 의견이 다르므로 집안이 평탄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신자와 불신자가 사업을 합자하여 동업을 한다면 또한 불화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며 가정에서나 사업에서 평탄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이 양보해야 하기 때문에 멍에를 함께 한 실수로 불신자가 하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 실수를 저지르면 성도가 지켜야할 도리에서 어긋나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므로 불신자와는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소극적인 뜻은 불신자의 불신 사상과 철학에 오염되고 동화될 정도로 불신자와 깊이 사귀지 말라는 말이며 또 적극적인 뜻은 불신자와 사귀어 오히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 그리스도의 사상과 철학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는 자와 불신자를 엄격하게 구별해주기 위해 몇 가지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둘을 차별화 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신자와 불신자를 의와 불법이라고 구별했습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의로워졌지만 불신자는 아직 죄인이라는 뜻이겠습니다. 또 빛과 어두움이라고 했습니다. 또 신자와 불신자를 그리스도와 벨리알이라 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와 마귀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살지만 불신자는 마귀의 방법으로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라 구별했습니다. 믿는 자는 성령이 마음속에 들어와 사시므로 성도는 성령의 전이되지만 불신자의 마음에는 자기들이 섬기는 세상 욕심으로 채워져 있으므로 우상으로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보통 눈으로 보면 신자와 불신자가 차이 나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사도 바울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엄청난 차이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신자와 깊이 사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불신자의 행동을 닮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세상 풍습을 따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하나님의 자녀의 몸가짐 마음가짐을 바로 하여 성도의 성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또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주신 교훈은 성도가 자기의 몸과 마음을 잘 관리하여 정결을 유지하라는 교훈입니다. 자신이 정결하게 관리하기 위해서는 불신자들의 사회에서, 불신 가족에게서 또 불신 친구에게서 자신을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연탄 장사가 왜 새카맣지요? 연탄을 가까이 하다보니 처음에는 손에 조금 묻다가 점점 새까만 것이 얼굴에까지 묻게 되기 마련입니다. 새카맣지 안으려면 연탄을 가까이 하지 않을 도리밖에 없어요. 자신을 정결하게 유지하려면 새까만 연탄에 비유되는 세상 풍습, 세상 친구 또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멀리하지 않으면 점점 세상에 물이 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들에게 더러운 것을 멀리해야할 이유를 분명히 해주었습니다. 우리들은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형태로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시는 집을 언제나 깨끗하게 청소해두어야지 그렇지 않고 그 집이 더러우면 성령은 못살고 나가버리고 대신 사단이 들어와 사단의 집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우리들이 예배드리는 예배당을 거룩한 성전이라고들 합니다. 그리고 기도 드릴 때에도 우리들을 성전에 모이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구약 사상이지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집에 사시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짓지 아니한 집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하나님이 사시므로 우리 몸은 거룩한 집, 즉 성령의 전이되는 것이며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모임은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를 원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도록 자기를 성결케 지키기시를 바라는 모든 성도님들은 자기 마음에서 미움, 시기, 질투, 욕심 등 자신의 성전을 더럽게 하는 모든 죄의 요소들을 추방해야 합니다. 또 불신자들의 우상 숭배적인 모든 습관을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장난이나 재미로도 토정 비결이나 운수나 손금을 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간지에 나오는 띠별로 나오는 운수 풀이를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상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절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섬기는 자리에 세상의 어떤 것이 자리잡게 하시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눈과 손과 발걸음 그리고 마음을 잘 관리하여 성전을 늘 깨끗이 관리해야 합니다. 바늘구멍이 점점 커져서 성령이 빠져나가는 큰 구멍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켜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주님의 영접을 받는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