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갈라디아서 편지가 바울에 의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보내진 환경과 배경에 대해 이해하므로 오늘 주신 본문의 의미를 보다 더 잘 이해하리라 봅니다. 유대인들은 대대로 율법을 지켜왔고, 율법에 따라 많은 의식을 행해왔으며 그 중 가장 유대인들이 다른 이방인들과 차별화를 강조한 것이 바로 할례였던 것입니다. 모든 사내아이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음으로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유대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의해 기독교라는 것이 소개되었는데 유대인들은 새 언약인 기독교를 율법의 완성으로 보지 않고 율법과 유대교의 연장선상에서 기독교를 유대교에 혼합하여 받아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언제 모였지요? 안식일 즉 토요일에 모였으며 기독교는 주일에 모이게 되므로 기독교의 시작은 토요일에도 모이고 주일에도 모이고 했을 것입니다. 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적인 의식을 계속 지키면서 기독교를 또 받아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새로 시작되어 얼마 되지 아니했던 시기에는 많은 혼동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성령에 감동을 받은 사도들에 의해서 인도되었던 기독교가 짧은 시간 안에 유대교의 신앙과 뚜렷이 구별되어 혼동에서 해방시켜주었음에는 틀림없었겠지만 일부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기본 신앙에 덧붙이는 유대교적 기독교를 믿어오고 또 남들에게도 그런 유대교적 기독교를 믿도록 강요해왔던 것입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문제가 할례문제인데 이방인 기독교인들도 예수를 영접할 뿐 아니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할례를 필수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옹고집이 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고집을 부렸던 자들을 유대주의자들이라 불렀는데 이런 부류의 유대주의자들이 이방 지역인 고린도 지역에나 갈라디아 지역에까지 찾아가서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전함으로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받아드린 성도들에게는 큰 혼란이 온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율법적인 어떤 의식을 지키는 어떤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만으로 구원되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는 받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사도 바울을 가짜 사도 또 사도 바울이 가르친 복음은 가짜 복음이라고 소문을 퍼트려 갈라디아 지역 교인들이 많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이런 상항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유대주의자들이 거짓임을 증거하고 사도 바울 자신이 하나님에게 인정된 사도이며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진짜 복음임을 증거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며 또 오늘의 말씀이 그 중 일부인 것입니다.
오늘 주신 본문은 현 시대에도 교파 교리와 성경을 혼합하여 그런 혼합된 신앙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어디서 어디까지가 복음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사람이 만들어 붙인 교리인지를 분간하여 복음만을 순종하는 순수한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많은 깨달음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진리를 고수한 사도 바울(1-5) [2]복음 전도와 연합(6-10)입니다
[1]먼저 1절부터 5절까지의 진리를 고수한 사도 바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오늘 본문과 연관된 주제가 사도 행전 15장에 있는데 유대로부터 왔다는 유대주의자들이 안디옥 교회에 들어와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하므로 이 문제가 교회안에 큰 문제가 되므로 안디옥 교회가 사도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어떤 형제들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어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을 만나 이 문제를 내 놓고 의논한바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를 회의에서 의논하고 지도자들이 편지를 써서 바울과 바나바와 예루살렘 교회 교인중 유다와 실라를 함깨 보내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롤 영접하는 믿음으로 구원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쓰이기를 14년 후에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방문이 바로 사도 행전 15장에 나온 방문인지 아닌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같은 문제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와 연관 없이 복음을 이미 16-17년 동안 전한 이후에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고 하므로 사도 바울이 사도된 근원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이며 계속 하나님의 계시 즉 성령의 지시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복음의 정통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명한 자들에게 자기가 전한 복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펼쳐보였다고 했습니다. 유명한 자들이란 6절에 나오지만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란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아니고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일했던 야고보인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아 이미 전파했던 그 복음을 소개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오랜동안 전달했다는 복음이란 기독교에서는 그 이상 할례같은 율법의 의식을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를 믿는 은혜로만 구원된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하여 교인들에게 복음도 받아드리고 할례도 받아야만 된다며 디도도 할례를 꼭 받아야한다는 끈질긴 공격에도 불구하고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 함께 데리고 가서 사도들과 장로들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믿기는 사탄은 사도 바울이 옛날 율법을 준수했던 옛 믿음으로 자신을 후퇴시키려 함인 줄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철저히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무시해버리고 자기가 받은 진리를 고수했던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행 16:3에 보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푼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도에게는 할례를 베풀지 아니하고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베푼 사실이 이중적인 믿음을 가진 것인가라는 생각을 가질 지 모르나 그 이유는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행하는 관습으로 행한 것이지 할례도 받아야 구원된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사상에 동조해서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두 번째는 6절부터 10절까지의 복음 전도와 연합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6절에서는 유명하다는 야고보, 베드로, 요한을 만나보았지만 자기가 전한 복음과 다른 바가 없어서 어떤 조언을 받은 바가 없었다고 기록함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 하여 유대인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복음과 안디옥 교회를 중심하여 이방 지역에 전달되고 있는 복음이 일치가 되었음을 확인 것입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복음이 정통이었음을 확인한 것이 되겠습니다. 오직 새롭게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복음 전도자들에게 다른 사명과 은사를 주시어 베드로에게는 유대인들 즉 할례받은 자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시고 사도 바울에게는 할례를 모르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신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이방인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허물 수 없는 벽이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끼리도 어떤 오해를 인한 적대감이 어느정도 가능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만나 피차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나눔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2대 산맥인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 사역에 대한 작자의 은사와 사명을 확인하게 되었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10절에 보니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복음에 대한 각자의 사명을 다할 뿐 아니라 예루사렘 교회의 구제를 위해 이방 교회 성도들이 구제 헌금을 모아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사도 바울로서는 그들이 부탁하기전에도 스스로 힘써 행하고 있음을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복음과 전통적 신앙을 혼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어왔던 자들이 기독교에 개종했다고 한다면 이전 자기들이 믿어왔던 사상과 방식으로 기독교를 소화하려고 하고 그 방식으로 믿음 생활을 하려고 할 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복음을 그 어떤 것에도 혼합하지 말고 복음 그대로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공자의 말이나 철학자나 신학자의 이론도 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교파에서 오래 해오던 어떤 습관을 혼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들의 믿음을 새롭게 하나하나 말씀에 따라 점검해보아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시행해오고 있는 것이 순수한 복음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과 같은 무리들에 의해서 그 무엇이 더해지거나 빼졌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전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독교가 교인들을 끌기 위해 비성서적인 달콤한 말로 우리들의 신앙을 오염시켰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미신적인 신앙으로, 때로는 도덕적이요 이방 종교같은 신앙을로 우리를 마비시켰는지 모릅니다. 어떤 자들을 두고 신앙이 좋다고 칭찬해오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을 많이 보고 잘 듣는 신비주의자가 믿음이 좋은 자 입니까? 기복 신앙을 강조하는 자가 믿음이 좋은 자입니까? 우리들은 무당 신앙이나 교파 신앙에서 해방되어 복음 신앙으로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성경으로 대조해보고 성경에 있는 것이라면 행하고 없는 것이라면 버려야 한다는 교훈이며 내가 말씀에 따라 확신한 것이라면 어떤 강력한 집단에서 나를 억지로 행하게 하더라도 진리를 고수해야 한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진리를 고수하기란 외롭고 힘들고 심지어 비난도 받게 되겠지만 사람들로부터의 인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장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 진리를 버려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 무엇보다 위에 놓는 신앙을 가지셔야 합니다. 내가 몇 십 년간 지켜온 내 종교나 내 교파적인 신앙이나 내 가문이나 내 사상보다 위에 있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는 다 잠잠하게 만들 수 있는 확고한 신앙을 가지시라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지역이나 인종이나 어떤 문화에 전연 상관되지 아니하고 같은 진리가 세계적으로 연합하여 전달되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지역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다른 씨앗이 뿌려진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 다른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남을 지도하고 상담해주더라도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성경적인지, 신앙적인지 확인하고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상담해주고 있는 것이 비 신앙적인 말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저는 전연 비 신앙적인 말이 신앙인의 입에서 쉽게 나오는 것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저분이 과연 신앙을 가진 자인가 의심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의 판단도 성경적이어야 하고 남에게 지도하는 것도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두 번째 교훈은, 우리들의 신앙이 살아있음을 보여준 증거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가난한 자중에서 먼저 믿는 가정들을 우선해햐 함이 순서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몇 가지 약한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사업이 교회적으로 시행되고 있지 않는 점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두고 적은 액수라도 가난한 믿음의 가정에 구제 헌금을 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며 기회 있는 대로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말씀을 전달받은 우리 성도들이 진리를 고수하며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확고한 신앙을 가지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