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적 권면 – 갈라디아서 6:1-10

어떤 사람을 두고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의 성도들에게 좋은 신앙을 갖도록 두 가지 측면에서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교리적으로 성경을 잘 못 알고 있는 그들에게 성경적 믿음을 갖도록 교리를 여러 가지의 비유를 들어가면서 권면해 주었고 두 번째는 일상생활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실천적 측면에서 권면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이란 바른 성경적 지식과 믿음을 갖는 것이요, 반면에 일상 생활에서 신자답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쉽게 말을 한다면 비 성서적인 교파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 신앙이 좋다는 평가는 잘 못 된 것이요, 또 아무리 좋은 교회를 다닌다해도 성도의 생활에 성령의 열매가 없다면 역시 좋은 신앙인 이라고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첫째는 교회를 잘 선택해야 하고 둘째는 자기의 생활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육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소개해 주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두 가지 행동 지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즉 좋은 신앙이란 올바른 교리와 올바른 삶이라고 정리를 했는데 이 말을 다른 말로 정리한다면 좋은 신앙이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고 또한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부터 4장까지 에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강해했다고 한다면 5장과 6장에서는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 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른 교리를 실천하는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 교회 성도들은 좋은 신앙인을 100점으로 본다면 교회를 잘 선택한 것으로 최소한 50점은 받은 셈입니다. 이제는 우리 각자의 삶을 통해서 점수를 추가해 나가므로 80점 90점의 점수를 받는 좋은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각자의 생활에서 높은 점수를 더 추가할 수 있는 방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받은 방법을 잘 실천하시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는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찾은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대할 마땅한 태도(1-5) [2]선행에 대한 권면(6-10)입니다.

 

[1]먼저 1절부터 5절까지의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대할 마땅한 태도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 에서는 혹시 어떤 성도가 죄를 지었을 경우에 죄를 지은 성도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 가에 대해 교훈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중에서 한 사람이 육신이 약한지라 범죄를 저질러서 남들이 알고 신문에 났다고 가정해봅시다. 범죄를 저지른 본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교인들 보기에도 부끄럽고 교회에 피해를 끼쳤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지요. 교인들 중에도 교회가 사회에 망신을 당하게 만든 그 사람을 두고 원망을 하고 강한 비판을 하게 되겠지요. 결론적으로는 죄를 지은 본인이 자기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고 또 교인들 부끄러워서 교회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말 것이고 교인들은 그의 결정은 마땅한 것이라고 받아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결정을 세상적인 태도라고 말을 한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신령한 태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에서는 범죄한 성도를 대하는 우리들이 신령하고 온유한 심령으로 대하고 접근하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령의 사람의 입장에서 범죄한 성도를 대하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취해 벌거벗고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고 자기 아버지가 수치스럽게 발가벗고 누어있다고 다른 형제들에게 누설한 아들도 있었지만 다른 한 아들은 수치를 본인도 보고 싶지 않고 남도 보지 못하게 수치를 가려드리려고 옷을 가지고 뒷걸음질로 들어가서 덮어드렸었는데 수치를 가려드렸던 아들의 심령으로 접근하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범죄한 성도를 대하는 우리들의 첫 자세가 마땅히 신령하고 온유해야 한다는 것은 뉴스거리가 생겼다고 동서남북에 전화를 걸어 소문을 퍼트리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문제를 덮어주고 풀어주려는 마음으로, 호의와 사랑과 겸손한 마음과 태도로 범죄한 형제를 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우리를 대하셨던 자비의 마음으로 범죄한 형제를 접근하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 때문에 울고 있을 그에게 함께 울 수 있는 가슴과 눈물을 가지고 접근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신령하고 온유한 마음의 자세로 접근하여 그의 잘못을 바로 고쳐주고 위로해 주라는 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고쳐주면서 반면에 자신도 그런 실수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연약한 육을 입은 사람임을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을 살펴보아 자신도 그런 유혹과 실수가 없도록 만전을 기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남의 실수나 잘못을 보면서 스스로 교만해지고 남을 깔보기 쉬운데 오늘 본문에서는 스스로 속이지 말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말은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남이 지은 똑같은 죄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지 않는 자는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나약한 자세에서 남이 죄를 짓고 실수를 했을 때에 그가 짊어진 짐을 내가 나눠질 수 있는데 까지 서로 나누어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형제의 짐을 어떻게 나누어져 지며 내가 질 짐을 어떻게 지는 것일까요? 남의 죄를 덮어주고 사랑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눈물로 그의 잘못을 바로 고쳐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두 손에 들고 가는 형제의 짐 하나를 내가 들어주듯 형제의 죄짐도 나누어 질 수 있는 형제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져야할 짐인 것입니다.

 

[2]두 번째로 6절부터 10절까지의 선행에 관한 권면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6절부터 10절까지 에서는 평상시에 우리들이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지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평상시에 갖고 있는 선행의 지침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주신 지침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지침의 초점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가 누구일까요?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들로부터 너무 푸대접을 받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도들에게 더 큰 대우를 했어야 마땅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꼭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대접하라는 의미보다도 교인들은 자기들이 영적인 양식을 공급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는 영적 지도자에게 물질적으로 충분한 보상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을 한다면 영적 지도자의 가치를 알고 영적 지도자와 자신들의 관계를 잘 가지라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의 위치와 직무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더 풍족한 대우를 해 주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고 영적인 일중 하나인 영적 지도자를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자는 영적인 것을 거둘 수밖에 없고 영적 지도자가 누구인지 그의 신분과 가치를 알지 못하고 영적 지도자를 위해 투자할 수 없는 자는 영적인 일에 무관심한 자이므로 육적인 것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는 대로 거둔다고 한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에게 좋은 것을 나눌 뿐 아니라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해야 함을 권면하고 있으나 우선 순위로 말을 하자면 믿는 가정이 먼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나 어떤 성도를 도와주었으나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9절에 보니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머지 안아서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 오시면 다 거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범죄한 형제를 위해 짐을 나눠지라는 교훈입니다. 어떻게 짐을 나누어진다고 했습니까? 형제가 범죄한 이유로 스스로 교회를 멀리하거나 아니면 교회가 그를 따돌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시게 까지 하셨는데 교회는 반대로 죄인을 배척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죄짐을 나누어지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범죄한 형제가 죄를 회개하여 죄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옆에서 사랑으로 협조해 주라는 것입니다. 신령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접근하여 죄를 고쳐주고 우리 자신도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는 똑같은 인간임으로 말해주어 죄를 지었으나 회개한 그 형제나 우리들이 아무런 차이가 없는 똑같은 존재들임을 확인시켜주므로 그가 새롭게 힘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계속 함께 기도하여 우리 모두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에서 늘 해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교훈은 기회 있는 대로 선을 행하되 영적 지도자에게 물질을 나누고 또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을 행하라는 교훈입니다. 저는 영적 지도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대우를 하는 것을 반대한 사람입니다. 일반 교파에서 지나치게 영적 지도자들에게 대우를 해주므로 영적 지도자가 육적 지도자가 되게 만드는 사례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영적 지도자에 대한 대우가 너무 소홀하여 영적 지도자인지 육적 지도자인지도 구별을 못하는 것이 아니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내가 더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영적 지도자나 일반 교인들이나 다 같은 등급의 성도요, 하나님의 아들딸들입니다. 다만 영적 지도자는 같은 아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는 자는 당연히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 대해 마땅한 태도와 대접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 대해 별 관심이 없을 것이 아니겠어요. 말을 바꾸어 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더 뜨겁게 하고 그 소망을 키워주는 주의 종들에게 더 대접을 잘 해주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한 줄 알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잘 대접하고 있는 자라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좋은 열매를 거둘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둔 자들은 또한 말씀을 가르치는 자뿐 아니라 성도들에게 선행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러 하나님께서 선행에 대한 상을 내리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교훈대로 우리 성도들 모두가 형제의 짐을 나눠지는 자들이 다 되고 기회 있는 대로 선을 행하는 자들이 다 되어 주님 오실 때에 큰상을 다 받으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