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권고와 인사 – 갈라디아서 6:11-18

오늘로서 갈라디아서 강해가 끝나게 됩니다. 오늘 소개되는 마지막 여덟 절은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결론이라고 보아도 되겠습니다.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의 성도들에게 꼭 전달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이 부분을 사도 바울이 자필로 쓰되 큰 글씨로 쓴 마지막 부분이 오늘 우리들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의 성도들에게 전달하여 꼭 지키도록 하기 위해 큰 글씨로 써 보낸 마지막 권고가 오늘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교회 성도들의 마음 바탕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소개되는 마지막 부분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의미를 깨닫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찾은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큰 글자(11절) [2]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신앙(12-13) [3]십자가를 자랑하는 신앙(14-15, 17) [4]은혜와 평강(16, 18)입니다.

 

[1]맨 먼저 11절의 큰 글자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1절을 보니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마지막 부분의 말문을 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시력이 약하거나 아니면 다른 건강상의 이유로 각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낼 때에 다른 사람에게 대신 쓰게 하고 편지의 마지막 인사 부분만 친필로 써서 사도 바울이 써서 보낸 편지임을 확인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에서는 마지막 인사뿐 아니라 더 많은 분량의 다른 내용까지 포함하여 친필로 쓰되 큰 글자로 써서 보낸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큰 글자라는 뜻은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큰 글자로 썼다고도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사도 바울이 시력이 나쁘므로 큰 글자로 썼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남들의 손을 빌려 대신 쓰게 했거나 자신이 직접 썼거나 다 중요하고 가치있는 사도 바울의 편지임에는 틀림없으나 사도 바울은 독자들에게 오늘 소개받는 부분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 ‘내 손으로’ 또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한 것을 보아 갈라디아 지역 성도들뿐 아니라 모든 독자들에게 이 본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2]두 번째로 12절부터 13절까지의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신앙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써서 보낸 이유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고 하는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을 찾아와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율법의 멍애를 메도록 했기 때문이었음을 우리들은 이미 여러 차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공격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유대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서는 한때 자기도 유대주의자로서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했던 부끄럽고 쓰라린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고수하므로 대다수의 유대인들로부터는 인기를 얻을 수는 있었으나 소수의 기독교인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과거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갈라디아 교회들에 찾아와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율법의 멍에를 씌우는 유대주의자들을 두고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율법 시대에는 마땅히 율법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아야 했겠지만 시기적으로 율법이 폐기된 때에 할례를 강조하므로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는 자로 자랑도 하고 자기는 무할례당과 다른 할례당임을 자랑으로 삼기 위한 그들을 두고 세상 모양만 내는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때에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서였으나 갈라디아 교회들을 찾아온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는 이유가 율법을 철저히 지키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대다수의 인기를 얻어 핍박을 면키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무리들과 같은 배를 타므로 핍박을 피하고 또한 많은 이방인들에게까지 할례를 받게 했다는 숫자적 훈장을 받아 유대주의 자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함이라고 함으로 이방인들에게까지 할례를 강요한 유대주의자들을 두고 세상 모양만 내기 위한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3]세 번째로 14절, 15절, 17절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신앙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과 자신을 차별화 하여 자신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은 자들로서 무할례자와 구별하였으며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라 하여 이방인들과 구별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내 놓은 자랑거리는 혈통에 따라 자동적으로 얻은 명예와 자랑입니다. 즉 육체의 모양을 갖춘 자들의 자랑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자신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신앙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신앙이란 ‘세상과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린 신앙이라고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세상과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신앙이란 어떤 신앙일까요?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볼 때에 자기가 속해 있던 율법의 골수분자들의 당파인 바리세파의 명예를 버린 신앙이요 자신이 베냐민 지파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후예중의 후예라고 하는 혈족의 명예를 버린 신앙이며, 자기가 배운 학문과 자기의 꿈과 육체적 안일과 욕망을 다 버린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다 버렸다고 했습니다. 배설물이란 무엇인가요? 화장실에 가서 쏟아 내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 모략하고 중상하며 목숨을 바치기까지 하는 그런 것들을 화장실에서 버리는 배설물과 같은 것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의 혈통이나, 학문이나 재물이나 그 무엇도 다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다고 하므로 자랑거리의 가치관을 확립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자랑은 ‘육체적으로 잘나고 못난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아 심령이 변화된 나’라고 했습니다. 세상 족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든 이방인이든, 왕족이든 종의 집안이든, 무식한 집안이든 학자의 집안이든 육체적 모양과는 상관이 없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려 마음이 거듭난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랑할만한 자랑이고 값어치가 있는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이 편지를 받은 이후로는 자기를 괴롭게 말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진리에서 벗어나 육체적 모양만 내려는 거짓 지도자들에게 속아넘어가서 역시 육체적 모양만 내는 신앙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을 향해 자기를 소개하기를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 때문에 매맞고 굼주리고 헐벗고 상처난 것을 말합니다. 잘 먹고 잘산다는 기복 신앙과 정 반대의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잘 믿었기 때문에 날마다 죽었다고 했으며 자기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지닌 예수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이예수 때문에 받은 고난과 상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4]네 번째로 16절과 18절의 은혜와 평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보낸 모든 편지의 마지막에는 거의 똑같은 인사로 끝을 맺게 되는데 갈라디아서는 16절에서 평강과 긍휼이 있기를 기원한다고 했고 18절에 보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편지의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이 늘 함께 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죄 사함을 주신 은혜로 시작하여 평생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평화를 맛보고 사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있어야할 것이 은혜와 평강임으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와 평강의 복을 누릴 자를 소개해 주고 있는데 ‘이 규례를 행하는 자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 했습니다.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축도하는 목사님들의 축도에 참예하는 모든 사람이 은혜와 평강의 복을 다 누리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 즉 이방인이든 이스라엘 사람이든 주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마음에 변화 받은 자들이 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육체적 모양만 자랑하려는 무리들은 신앙의 모양은 가졌으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고자 하는 참 평안과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심령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결론 부분인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들은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는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신앙을 가지라는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할 때에는 어떤 동기로 신앙 생활을 시작했더라도 이제는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사업이 잘 되고 병도 낫고 모든 어려움이 다 사라진다는 선전을 듣고 예수 믿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자는 세상과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므로 세상과 나는 없고 예수 그리스도만 내 속에 살아 남는 것임을 아는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의 신앙에서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신앙으로 변화되는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 생활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두고 복을 받았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보다 더 크고 귀한 복은 그런 육적 안일과 부유 보다는 심령의 변화를 통한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것임을 알고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난 나의 자랑에서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난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어 물질적으로 부유해진 것도 하나님께서 내리신 복일 뿐 아니라 사업이 실패했거나 재산을 잃은 것도 하나님께서 내리신 복으로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적인 모든 일이 다 잘된다는 기복 신앙에서 오히려 잘 믿는 자도 핍박을 받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듯 잘 믿는 성도들에게는 예수의 흔적을 갖게 된다는 신앙으로 차원을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목적이 내 꿈과 욕심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 꿈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성취시키는 신앙으로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부터는 시험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로 가르쳐야 할 터인데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으로만 가르치니 기독교는 세상의 모양만 내는 종교로 계속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험이 오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견디는 자에게는 결국 사단은 손을 들고 말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는 주님께서 오실 날에 결정 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랑용 직분도 얻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헌금하고 선을 행했던 사람 중심의 신앙에서 최후의 승리를 소망하며 세상과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예수 때문에 고난을 받아 우리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는 것을 오히려 복으로 아는 높은 신앙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